2020.01.29 ~ 2020.03.01 업로드(@I5_HU7KUMA)

개인적인 설정(현대 AU, 인수, 성격 및 세계관 등)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썰 형식으로 흘러가며, 기존 트위터 업로드본에서 일부 수정이 있습니다(내용 변경X).




일부 인수/수인이 애완동물로 취급되고, 몸집이 작고 어리고 손발, 귀, 꼬리가 전부 완벽하게 갖춰질수록 그 가치가 높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이야기야. 물론 최근엔 인수/수인을 애완동물로 사고팔거나 기르는 것은 범죄행위에 해당되어 극히 일부 사람들의 부의 상징으로서 거래된다는 소문이 돌 뿐 옛날 일로만 남아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리고 어느 비오던 날, 너덜너덜한 천을 몸에 두른 채 벌벌 떠는 고양이 인수를 한 남성이 발견하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 둘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 돼.


남성은 훤칠한 키와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머리칼, 길고 곧게 뻗은 큰 손과 피곤한 인상을 가진 잭이라는 이름의 인물이었어. 그는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후,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골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걷고 있었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골목. 며칠간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에 그가 신은 구두는 어느새 진흙과 먼지로 엉망진창이야. 잭은 가뜩이나 구겨진 표정을 한층 더 찡그리며 쉬지않고 걸었지. 그런데 바로 그때였어.


야옹. 야옹.


시끄럽게 울리는 빗소리 사이에서 가냘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거야. 잭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지. 잘못 들은 걸까, 피곤한 탓에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어두운 시야로는 평소와 같은 우중충한 골목의 풍경밖에 보이지 않아.


야옹.


그때 한번 더 들려오는 울음소리. 잭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그곳에 있는 것은 커다란 쓰레기봉투와 그걸 덮고 있는 눅눅한 종이상자들. 내리는 비 탓에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걸 꾹 참으며 종이상자를 하나씩 걷어내자 그 아래엔 작은 소년 하나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있었지. 잭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소년을 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소년의 이름은 나이브. 푸른 털의 귀와 꼬리를 가진 고양이 인수야. 나이브는 원래 어느 고위 간부의 집에서 길러지던 애완동물이었어. 지금보다 훨씬 몸이 작고 어렸을 때, 흔히 말하는 뒷거래로 팔려나가 홀로 낯선 곳에서 애완동물 취급을 당한거지.


문제는 나이브의 손이 인간의 것이라는 점. 앞서말했듯 손발, 귀, 꼬리가 완벽하게 갖춰진 어린 인수일수록 귀하다고 평가되는데 나이브의 손은 다섯손가락 멀쩡한 인간의 손이었거든. 그러니 주인이 나이브를 예쁘게 볼 리가 없었지. 나이브는 결국 반 강제로 인간의 손을 가리기 위한 동물의 손을 끼고 생활하도록 교육을 받아. 하지만 본래 인간의 손을 가진 나이브가 손가락 개수부터 다른 동물의 손에 적응하는 건 어려웠지. 애초에 두꺼운 털장갑이 답답하기도 하고 감각이 둔해지기도 하잖아. 주인의 집에 들어간지 얼마 안됐을 무렵에는 어린마음에 장갑을 몰래 벗었다가 걸려 혼이 난 적도 많았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동물의 손으로 식기를 깨뜨려 벌을 받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


그래도 나이브는 주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완벽한 조건의 인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어느 비오는 날 나이브는 차디찬 밤골목으로 버려지고 말지. 이유는 단 하나. 몸집이 너무 커버렸다는 것.


나이브는 있는 힘껏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고, 털장갑에 붙은 고양이 손톱을 세워 주인의 옷깃에 매달려 보았지만 주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타고 떠나버렸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를 맞아가며 계속해서 주인을 기다리던 나이브를 잭이 줍게 된 거지. 


그리고 1년 뒤.


"나이브, 점심 시간이에요."


잭은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컵을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이브를 불렀지. 어디선가 토도독 귀여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푸른 머리칼과 쫑긋 솟은 귀를 가진 소년이 살금살금 걸어나와. 이 집에 온지 벌써 1년은 되었는데도 묘한 경계심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잭은 쓴웃음을 지어보였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브는 잭이 앉은 맞은편 의자에 슬그머니 올라가 자리를 잡았지. 그리곤 조심스레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이브의 손은 여전히 동물의 손을 닮은 털장갑을 낀 채야. 둔한 동물의 손으로 나이프와 포크가 제대로 잡힐 리 없잖아. 얼마 안가 나이브의 손에서 포크와 나이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지. 잭은 익숙하다는 듯


"제가 치울테니 나이브는 이거 마시고 있을래요?"


라며 나이브의 앞에 적당히 식은 우유를 내려놓아. 나이브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양손으로 머그컵을 들어 우유를 마시기 시작하지. 잭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식기와 더럽혀진 바닥을 치운 후 새 식기를 나이브에게 건네주곤 본인 식사를 시작해.


"……잭, 나도."


그러나 얼마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식탁 아래로 잭의 다리를 툭툭 건드는 나이브. 잭은 기다렸다는 듯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제 무릎 위를 툭툭 두드려. 그러자 나이브는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잭의 무릎위에 자리를 잡지. 나이브를 무릎에 앉혀두고 한입크기로 자른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건 그를 데려온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잭이 먼저 제안했던 일이야. 식기 사용이 서툴어 식사가 어려우니 당신이 익숙해질 때까지 언제든 자신의 무릎과 양 손을 빌리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지. 나이브는 처음 그가 제안했을 때 '필요없어.'라고 딱 잘라 말했을 뿐더러 지금도 제 손으로 음식을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과는 언제나 잭의 무릎 위에서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는 꼴이 되고 말아.


"맛있어요? 너무 짜거나 싱겁진 않고요?"

"……그냥 그래."


나이브는 입을 삐죽인 채 샐러드가 꽂힌 포크를 내미는 잭의 손을 밀어내며 대답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잭은 싱글싱글 웃으며 샐러드를 나이브의 입에 억지로 밀어넣겠지만.


잭은 나이브의 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아. 설령 그 손이 점점 때가 타고,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그의 몸이 커지면서 장갑도 꽈악 낄정도로 작아져 그가 손가락을 굽히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더라도.


잭은 처음부터 나이브의 손이 인간의 것임을 알고 있었어. 비오는 날 그를 데려왔을때, 차디찬 비에 젖어 정신을 잃은 그를 따뜻한 물에 조심스레 씻기던 와중 단단히 묶인 손목의 매듭을 발견한거지. 그리고 그 매듭을 풀어내었을 때 드러난 다섯개의 번듯한 손가락. 추위에 하얗게 질린 그 손가락에 잭의 손끝이 닿은 순간, 나이브는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해.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벗을게요. 미워하지 말아요."


굳게 감긴 눈꺼풀 아래로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나이브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결국 그날 밤 잭은 곤히 잠든 나이브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이미 인간의 손을 들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브는 잭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간의 손을 숨기기 바빴어. 버려질 때조차 벗을 수 없었던 동물의 손을 손목의 매듭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잭 몰래 셔츠 단추를 끼우는 연습도 하고, 컵의 손잡이만 잡고 우유를 마시는 연습도 하고, 심지어 잭이 일을 하러 나갔을 때 더럽혀진 장갑을 조물조물 빨아서 말리는 등 부지런히 노력했지. 장갑을 말릴 땐 잭이 자신의 털을 말릴때 사용하는 '뜨거운 바람으로 순식간에 털을 말려주는 기계'를 사용했어. 위이이잉 무섭게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탓에언제나 머리를 이불더미에 폭 넣은 채 겨우겨우 장갑을 말렸지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지.


첫째, 나이브가 잭의 곁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보기좋게 살이 오르고 몸집도 어느정도 커졌다는 것. 작고 어린 개체를 선호한 전 주인탓에 제대로 된 영양섭취를 하지 못했던 나이브. 하지만 잭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먹기 싫은 야채(잭은 분명 자신의 접시에 있었던 당근을 은근슬쩍 나이브에게 권했다.)도, 좋아하는 우유와 고기도, 달콤한 간식도 잔뜩 먹게 됐거든. 성장기인 나이브가 쑥쑥 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야.


둘째, 나이브의 몸이 성장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장갑의 이음새가 터지기 시작한 것. 애초에 장갑이라는 건 소모품이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낡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나이브에겐 두려운 일이었지. '인간의 기준으로'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몸. 나이브의 머릿속엔 전 주인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어. 자신을 처음으로 밖으로 데려가준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던, 바깥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바깥구경을 한다는 사실로도 행복하던 그 날.


'넌 손도 그 모양이고 이젠 너무 커버렸으니 더이상 필요 없어.'


필사적으로 엉겨붙는 나이브의 작은 몸을 매몰차게 빗속으로 밀어내던 전 주인의 표정은 다 쓴 휴지조각을 버리는 것 마냥 아무렇지 않았지. 그 때부터 나이브는 자신의 손을 드러내는 것에 짙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거야. 잭에게 인간의 손임이 들통난다면 또 버려질거라고 멋대로 단정지은 거지. 하지만 나이브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손으로 사는 생활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늘 끼고 있는 장갑은 보기 흉할 정도로 엉망이 되고 말아.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보다 잭의 귀가가 늦어져 고요한 집엔 나이브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어. 오늘도 잭이 챙겨둔 식사를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먹는 것에 실패한 그는 입술을 앙 다물고 제 손의 장갑을 노려보았지. 이것만 없다면 그깟 포크 다루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닌데, 그깟 단추 끼우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닌데. 머리론 알고 있지만 어쩌겠어, 이게 없으면 잭이 날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코 끝이 찡하게 아려오는 나이브. 자신도 모르게 고이는 눈물을 성가시다는 듯 손등으로 막 문질러 닦았지.


그 순간 투둑, 툭 무언가 뜯기는 소리가 들려와. 소리가 난 곳은 당연히 나이브가 조금 전까지 손에 끼고있던 장갑이지. 낡은 탓에 겨우 연결되어 있던 이음새가 방금 전 행동에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뜯겨버린거야. 덩달아 손목의 매듭까지 뜯기면서 자연스레 안에 감춰져있던 흰 속살이 드러났지. 나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비교적 멀쩡한 오른손으로 뜯긴 반대쪽 장갑을 수습해보지만 일이 해결되긴 커녕 그나마 붙어있던 이음새마저 점점 뜯겨나갈 뿐이야.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쫑긋 선 나이브의 귀가 문 너머로 익숙한 구두소리를 캐치했어. 늦은 귀가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늘어지는 그 구두소리는 틀림없이 잭의 것이야. 아직 망가진 장갑을 수습하지 못한 나이브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불 속에 동그랗게 몸을 말았지. 그리곤 일부러 고롱고롱 코고는 소리를 내며 자는 척을 시도했어. 


"나이브,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하지만 이렇게 서툰 자는 척이 잭에게 먹힐 리가 없지. 잭은 피곤하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도 나이브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어. 그의 체중이 실리며 침대가 작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이불 너머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지. 마치 아이를 어르듯 가만가만 제 등을 쓸어주는 커다란 손. 평소라면 입으로는 싫은 소리를 뱉으면서도 반가움에 얼굴을 빼꼼 내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어. 망가져버린 동물의 손,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몸. 어두운 이불 속에서 나이브는 그저 잭이 이불을 들추지 않기를, 제 손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며 두 눈을 질끈 감을 뿐이야.


한편 잭은 평소와는 다른 나이브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했지. 오늘처럼 귀가가 늦어지는 날엔 반드시 '왜 이제 와?'라고 화내듯 유연한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고 있거나, 이불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 혹시 자신이 없는 사이 어딘가 다친 건 아닌지, 몸이라도 아픈 건 아닌지 싶어 가만히 등을 쓸어주어도 오히려 몸을 더 웅크리기만 하는 나이브야.


이쯤되면 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이브를 감싸고 있던 푹신한 이불을 세게 잡아당겼어. 그리곤 이불 아래에서 여전히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벌벌 떠는 그를 억지로 일으켜 앉혔지. 다급하게, 그러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잭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체크하고 어딘가 아픈 곳은 없는지 묻기 시작해. 그러다 문득 나이브가 자신의 양손을 등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안 돼, 보지마!"


등 뒤에 숨긴 손이, 흰 피부의 작은 인간의 손이 잭의 큼지막한 손에 이끌려 두 사람의 눈 앞에 드러난 건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어. 나이브의 얼굴은 눈에 띄게 새하얗게 질려가고 잭의 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두 팔은 어느새 힘없이 늘어진 채 잘게 떨리고 있었지.


"……장갑, 망가져 버렸네요."


얼마간 흐르던 침묵을 깬 잭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어. 그리고 짧은 한숨을 한 번. 그 한숨에 담긴 의미를 '더이상 너는 필요없어.'로 받아들인 나이브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해.


"아니야, 좀 더 쓸 수 있어. 그냥 옆이 조금 뜯어진 것 뿐이야. 여길 이렇게 붙이면…… 이것 봐, 멀쩡하잖아! 앞으로도 계속 이 손으로 살 수 있어."

"……."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지. 오히려 표정이 점점 더 구겨질 뿐이야. 그야 그렇지. 이제야 겨우 나이브에게서 자연스레 동물의 손을 빼앗을 기회를 잡았는데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조금 더 쓸 수 있다고 헛소리를 쏟아내고 있으니.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나이브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한 채 이렇게 말을 잇겠지만.


"……잭, 혹시 그동안 진짜 손을 숨겨서, 내가 널 속여서 화난 거야? 미안, 언젠간 꼭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당신이 날 버릴까봐, 두 번이나 버려지는 건 싫어서,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동안 열심히 연습도 했는데 이렇게, 이렇게 갑자기……"


조심스럽게 시작된 말은 문장을 더해갈수록 히끅이는 딸꾹질소리와 섞여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말꼬리는 점점 흐려져. 그러는 와중에도 잔뜩 뜯긴 장갑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너덜거리는 천조각을 끌어모으는 행동을 반복하지.


"버리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이브는 눈을 질끈 감고 잭의 대답을 기다려. 눈꺼풀 아래로 그 어느 날처럼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한번 시작된 딸꾹질은 멈추질 않아. 이윽고 잭이 나지막히 나이브의 이름을 불렀어.


"……나이브"


그의 감미로운 중저음이 이렇게나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나이브는 속으로 장갑을 망가뜨린 자신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한편으론 언젠가 닥칠 현실임을 잘 알고 있었지. 그렇기에 더 두려웠던 걸지도 몰라.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에 새로운 반전이 들어설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그동안 나이브를 지독히 옭아매던 '동물의 손'이 그의 손에서 스르륵 벗겨졌어. 예상치 못한 일에 나이브는 놀란 눈으로 잭을 올려다보지만 눈물에 젖어 뿌연 시야에 담기는 것은 오직 그가 입은 흰 셔츠의 일부 뿐. 그제야 나이브는 자신이 잭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깨달아. 잭은 나이브의 등을 일정한 리듬으로 토닥이며 입을 떼었어.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손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마련하도록 하죠. 당신이 식기를 다루는 것이 서툴어도, 옷의 단추를 채우는 것이 어려워 저 몰래 연습을 하더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저는 상관 없어요."


얌전히 잭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이브. 그동안 몰래 연습하던 게 들켰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도 잠시, 이어지는 잭의 목소리에 다시금 귀를 쫑긋 세웠지.


"당신이 더이상 이런 쓸모없는 장갑을 끼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상관 없어요. 저는 이런 사소한 이유 하나로 당신을 제 손에서 놓아버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어떤 선택을 하든 더이상 당신이 버려지는 일은 없어요. 제가 당신을 미워할 일도, 당신이 두려워 할 이유도. 하지만,


잭은 거기까지 말하곤 나이브를 천천히 제 품에서 떼어놓았어.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서로의 숨이 맞닿을 정도로 밀착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자세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는 나이브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곤 조심스레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었어. 엷은 피부로 전해져오는 자신보다 약간 높은 그의 체온. 어스름한 빛 아래로 선명히 드러나는 그의 붉어진 눈가와 푸른 눈동자. 잭은 보란듯이 그 붉어진 눈가에 짧게 제 입술을 부딪혔지.


"……하지만 만약 당신이 더이상 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 장갑을 벗어버린다면."


갑작스러운 그의 입맞춤에 놀란 것인지 나이브는 몸을 크게 움찔 하더니 이내 슬금슬금 상대의 손 아래에서 제 손을 빼내기 시작해. 그러나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잭이 아니야. 금세 나이브의 손을  다시 제 손 안에 가두곤 아예 자신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을 겹쳐 손깍지를 껴 보였지. 마치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한편으론 연인을 대하듯 부드럽게. 갈곳을 잃은 나이브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향한 것을 알아챘을 때, 잭은 그 어느때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어.


"이렇게, 당신과 제가 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날, 나이브는 잭의 넓은 품에 안긴 채 지쳐 잠들때까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냈어. 계속되는 울음에 가쁜 호흡을 내쉬면서도 '정말로 나 안 버려? 계속 같이 살아도 돼?'하고 몇 번이고 물어오는 그에게 잭은 몇 번이고 긍정의 대답을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지. 한참 뒤, 날이 밝아올 무렵 겨우 잠든 그의 작은 손은 잭의 옷깃을 꼬옥 붙잡은 채 떨어질 줄 몰랐어. 


그리고 어느 평화로운 아침.


"나이브, ‘위이잉하고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걸로 머리 다 말렸어요?"

"……너 내가 그거 그만하랬지."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식탁을 앞에 두고, 능글맞은 남성의 웃음소리와 까칠한 성격의 고양이 인수 남성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오갔어. 잭의 권유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고 차근차근 인간의 손으로 사는 것에 적응하기를 수 년. 나이브는 어느새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두 손에 완벽히 적응해 능숙하게 대부분의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지. 게다가 첫 외출이 전 주인에게 버림받는 일로 연결된 탓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외출이란 행위 역시 이제는 별 문제없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거든. 덕분에 장갑을 버리기 전엔 할 수 없었던 바깥나들이도 이젠 주말마다 질릴정도로 다녀올 수 있었어.

물론 처음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나이브는 제 손을 자꾸만 주머니에 숨기려들었지. 하지만 그럴때마다 옆에 꼭 붙어있던 잭이 나이브의 손을 얼른 낚아채곤 손등에 입술도장을 찍어대는 탓에 그 버릇은 금세 고칠 수 있었어. 그 후에도 잭이 자꾸만 모른척 입술을 부벼대는 탓에


'남들 앞에서 내 손을 물고빠니까 남들이 오히려 더 쳐다보잖아.'


라며 나이브에게 싫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미안해요. 몇 번을 떠올려도 너무 귀여워서."


잭은 그렇게 말하며 늘 애용하는 의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그 말을 들은 나이브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올려묶곤


"시끄러워."


라고 톡 쏘아붙이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잭은 산뜻한 미소와 함께 제 무릎 위를 두어번 툭툭 두드려. 나이브가 식기 다루는 것이 서툴던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이브 역시


"오늘도 당근 나한테 떠넘기면 아예 집에 못 들어오는 수가 있어."


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잭의 무릎 위에 훌쩍 올라타 고소한 우유가 한가득 담긴 머그컵에 손을 뻗었지.


"나이브,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 배워온 거예요? 제가 알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끌어안지 마! 우유 엎지르면 어쩌려고 그래?"


이것 봐, 나이브 당신 너무 변했어요! 품 안의 청년보다 훨씬 큰 몸을 한껏 들썩이며 우는 시늉을 해보이는 잭.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성가시다는 듯 짧은 한숨을 토하는 나이브.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로운 식사시간을 가질거야. 굳이 예전과 바뀐 것을 짚어보라면 나이브가 보이던 묘한 경계심이 사라졌다는 점과 일방적으로 나이브에게 향하던 한입 크기의 요리가 두 사람간에 오가게 되었다는 점이지.


상대를 버릴 낌새는 커녕 귀찮을 정도로 과한 사랑을 쏟는 남성과 그런 남성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신을 더이상 '완벽하지 않은 존재',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된 청년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며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기나긴 이야기는 막을 내리게 돼.




잭나이브 지향 조각글 포스타입

최식상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